■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3년 01월 07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방송인 김미화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성규 교수(이하 이성규) : 김미화는 김미화 다울 때 가장 아름답다. 이분을 방송가에서 부르는 말인데요. 최고의 개그우먼 또 시사프로 진행자 문화재단 대표에서 이제는 귀농으로 자급자족까지 하고 계신 인생 개척자입니다. 방송인 개그우먼 김미화 씨 오늘의 주인공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김미화 방송인(이하 김미화) : 안녕하세요. 인생 개척자라고 얘기를 해주셔가지고 너무 거창한데요.
◇ 이성규 :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 김미화 :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 이성규 : 말씀하신 귀농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 김미화 : 귀농 귀촌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살고 있는 동네가 용인인데요. 용인의 거의 한 80% 정도 농업하고 계시는 주민 여러분들이 계시고 거기에 이제 낑겨가지고 저는 근데 이제 오래되어가지고 농부이기도 합니다. 농업 기술이 상당히 있습니다.
◇ 이성규 : 주로 어떤 농사를
◆ 김미화 : 논농사도 짓고요. 논농사는 벼입니다. 벼인데 그것은 뭐 저 혼자 짓는 게 아니고 동네 우리 농부님들이 도와주셔서 같이 협업하면서 그렇게 우렁이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고요. 한창 농사를 많이 지었을 때는 600평 밭에다가 배추 무 안 가꿔본 식물이 없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식물을 키웠었어요. 재미있습니다.
◇ 이성규 : 이제 올해로 데뷔 41년 차라고 들었어요.
◆ 김미화 : 벌써 그렇게 됐나요?
◇ 이성규 : 근데 1983년에 KBS 개그 콘서트 이쪽으로 데뷔하셨더라고요.
◆ 김미화 : 네 이때가 19세인데 그 이전에도 뭐 여기저기 하여튼 방송국 문은 많이 두드렸던 것 같아요. 개그맨이 빨리 되고 싶어가지고 코미디언이 빨리 되고 싶어서 그래서 교복도 안 벗고 당시에는 이제 교복을 입던 세대였었거든요. 그래서 교복도 안 벗고 이제 시험 몇몇 군데 보러 갔었고 교복 벗고 오라고 그래서 벗자마자 가서 시험 보고 이제 은상을 받고 시작을 했죠. 근데 저희 이제 친정 부모님이, 어머니가 계시는데 하도 반대를 하셔서 여자는 그냥 그 살림하다가 시집가서 이렇게 남자 덕으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을 갖고 계셔서 굉장히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말씀을 못 드리고 KBS 시험을 보러 간 거예요. 그런데 당시에 생방송 오늘이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이제 개그맨 합격한 사람들을 다 못 가게 해가지고 제가 집에 못 가고 밤 9시까지 이렇게 방송국 있다가 생방송에 딱 이렇게 얼굴을 내밀었는데 전체가 다 나간 거죠. 개그맨 뽑힌 사람들이. 친정어머니가 식사하시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리신 거 아니에요 놀래가지고 제가 왜 저기 있어?
◇ 이성규 : 교복 입고
◆ 김미화 : 아니아니요 교복 벗자마자요.
◇ 이성규 : 그 지금 캐릭터 중에 쓰리랑 부부의 순악질 여사 우리 학생들 알더라고요. 그래요 MZ세대들도 알아요.
◆ 김미화 : 아마 모를 텐데 모르는 분들이 많으실텐데요.
◇ 이성규 : 회자가 되나 봐요. 30년 지났는데도
◆ 김미화 : 왜냐하면 지금은 이제 그 미디어가 발전해서 유튜브다 또 옛날 텔레비전이다 뭐 별별 게 다 있잖아요. 볼 수 있는 상황 수단이 그리고 그런 분들이 많이 보실까요? 옛날 거를? 아마 개그 콘서트로 기억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또 오면 또 부모님이 얘기해 주셔서 또 이제 아니면 제 일자 눈썹 그게 이제 굿즈잖아요. 그러니까 그 인형 이렇게 그림 보고 이런 캐릭터를 가진 아줌마구나 이렇게 알고 있을 것 같아요.
◇ 이성규 : 그리고 묘비명. 앞에서 언급했는데 이 코미디언 하시고 이런 분들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타고 나서 웃긴 건지 웃기려고 노력을 하는 건지 그게 잘 모르겠어요. 어떠셨어요? 어릴 때부터
◆ 김미화 : 어릴 때 약간 타고난 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동네 어르신들이 제가 그 쌍문동에서 자랐거든요. 그 유명한 둘리가 아기공룡 둘리가 태어난 천지천 근처에서 살았습니다마는 거기는 굉장히 좀 당시에는 어려운 분들이 많으셨죠. 광주리 머리에 이고 자기 이제 상점도 없어서 길에서 과일 팔고 생선 팔고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으셨어요. 근데 근데 그분들이 그렇게 이제 제가 이미자 선생님 흉내 내고 또 뭐 웃겨드리고 이런 걸 되게 좋아하셔서 동네에서 전파상 하시는 아저씨가 저를 위해서 마이크를 하나를 주셨어요. 길에다가 딱 평상 앞에. 그래서 어른들이 이제 장사하시고 지쳐서 돌아오시면 다 모여서 그 마당에 모이셔서 제가 원맨쇼 하는 거 보셨어요.
◇ 이성규 : 그때가 몇 살 때예요?
◆ 김미화 : 6-7살 때부터. 그래서 그때 그분들이 1원도 주시고 뭐 팔던 과일도 주시고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돈의 맛을 알았던. 뭔가 뭔가 쇼를 하면은 돈이 온다 나에게 이렇게
◇ 이성규 : 그러면 수학여행 가셨을 때만 무료 공연을 하셨네요.
◆ 김미화 : 그렇죠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좀 날이 더워서 지루하거나 아이들이 수업 태도가 안 좋거나 그러면 항상 김미화 나와 그래서 좀 웃겨봐 그러면 이제 제가 딱 나가서 웃기거나 아니면 모창을 하거나 그러면 아이들이 딱 집중이 됐죠. 그때부터 그 와와 하는 그 함성의 맛을 제가 알아가지고 유명해져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그 뭐 수학여행 가서도 당연히 제가 안 가면 재미없을 정도다라고 친구들은 이야기를 했죠.
◇ 이성규 : 근데 어머니가 아까 잠깐 반대하셨다고
◆ 김미화 : 잠깐이 아니고 대단히 반대를 했습니다. 여자 팔자가 그게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를 그렇게 방송을 통해서 성공시키게 할 정도로 뭔가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을 하셨던 거죠. 평범한 사람하고 이렇게 방송 안에 텔레비전 안이나 라디오 안에 있는 사람들하고는 조금 이렇게 좀 거리감이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저게 어떻게 도달해야 되지 도대체 그 길에 막막했던 거죠. 부모로서 뒤를 봐주면서 뭔가 이렇게 서포트를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셨던 것 같아요.
◇ 이성규 : 근데 지금은 어떠세요? 지금은
◆ 김미화 : 지금이 아니고 이제 돈을 조금 벌기 시작하고 쓰리랑 부부로 제가 인기가 좀 있기 시작을 하면서 눈썹을 좀 진하게 그려라라든지 행동을 좀 크게 할 수는 없니 음매 기사로 할 때 이거 팔을 좀 더 높이 들면 안 되겠니 뭐 이런 식으로 간섭을 하시면서 돈을 좀 더 벌어라 하는
◇ 이성규 : 지금 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 김미화 : 85세 되셨어요. 연세가 많으시죠 이제
◇ 이성규 : 지금도 막 간섭을 좀 하세요?
◆ 김미화 : 지금은 우리 딸이 그냥 건강하게 편안하게 잘 되기를 바라시는 거죠.
◇ 이성규 : 근데 여러 가지 히트를 치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그 산출물은 어떤 거예요?
◆ 김미화 : 아니 아직까지도 쓰리랑 부부 순악질 여사 이렇게 기억하시고 저를 보러 오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 시골동네로 찾아오시는 분들 꽤 계시거든요. 늘 감사하고 그분들이 이제 저를 보면서 김미화 씨 텔레비전에서 그 옛날에 저를 웃겨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감사해요. 반가워요. 막 그래서 많이 봤어요. 그 옛날에 그래서 저도 텔레비전 안에서 많이 뵀어요. 그러고 깜짝 놀라서 진짜요 이러셔요. 그게 너무너무 감사하죠. 그 캐릭터가 참 좋아요. 저는
◇ 이성규 : 근데 저건 무슨 말이에요? KBS 개그콘서트를 만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 김미화 : 개그 콘서트의 아이디어를 제가 굉장히 많이 고민을 해서 그거를 이제 가지고 방송사에다가 제가 이렇게 만들어 봅시다 하고 먼저 제안을 했었죠. 그거는 제가 특별히 아이디어가 좋아서 그런 것보다는 우리 후배들이 이렇게 이제 당시에는 개그맨들 굉장히 많이 뽑았어요. 그래서 개그맨실에 선배들이 있고 후배들이 어려우니까 앉을 자리도 없이 의자를 놓는다는 게 한계가 있는데 개그맨들은 굉장히 많았으니까요. 그러니까 벽에 쭉 붙어 서서 선배들이 대본 읽는 거나 아니면 뭐 선배들이 연기하는 거 뒷바라지 해주고 이런 거 보면서 저의 그 신인 때의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 친구들도 나처럼 그런 코미디언으로 개그맨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왔을 텐데 선배로서 우리 후배들에게 후배들이 설 자리를 좀 내가 만들어줄 수 있으면 그것도 굉장히 좋은 일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몇 년 동안 고민을 했죠. 어떻게 신인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줄 수 있을까. 선배가 빛나는 것보다는 선배들은 뭐 성공한 사람이니까 어떤 역할을 줘도 잘할 수 있는데 후배들은 신인이고 또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까 무대에서 반짝반짝 빛날 수 있는 어떤 그런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아이디어를 가지고 가서 이제 실질적으로 PD 여러분들 설득 하고 그다음에 방송사에 있는 높은 분들께 말씀드리고 그래서 그게 만들어지게 된 거죠.
◇ 이성규 : 후배들 터전을 깔아주셨군요.
◆ 김미화 : 선배님들도 좋은 프로다 이렇게 이야기하시고 또 후배들도 고마워하고 그런 거 볼 때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혼자서 만든 건 아니고요. 아이디어를 가져갔기 때문에 우리 PD들이나 또는 작가 선생님들 이런 분들이 다 같이 협력해서 그래 우리 후배들하고 선배가 어울려서 하는 이런 좋은 프로그램 한번 만들어보자 이렇게 열심히 해서 된 거죠.
◇ 이성규 : 근데 이건 좀 개인적인 인생사이기는 한데 요즘은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이혼하실 때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나요?
◆ 김미화 : 네 뭐 누구나 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이혼하고 싶겠어요. 그냥 평범하게 잘 살고 싶죠. 근데 인생이 내가 꼭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어서 좀 서글픈 면도 되게 많이 있었죠. 아이들은 어리죠, 나는 앞날을 어떻게 꾸려가야 될까 이런 고민도 있었고 당시에는 제가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 이성규 : 그게 MBC
◆ 김미화 :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이었는데 방송을 제가 여러 개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방송 프로그램에 제가 영향을 주면 어떡하나 폐를 끼치면 어떡하나 이 생각이 먼저였었어요. 그래서 PD들에게 전부 이제 친한 분들이기는 합니다마는 제가 미안합니다마는 저를 잘라주세요. 이렇게 말씀을 드렸을 때 PD 선생들이 아니다. 방송은 방송이고 사생활은 사생활이지 이렇게 얘기를 해주셔서 제가 내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나
◇ 이성규 : 아니 그런데 뭐 방송 시작하기 전에 두 시간 전부터 와서 자료 조사하고 신문 다 보고 훑어갖고 하는 그런 진행자가 어디 있어요.
◆ 김미화 : 열심히는 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분들보다 훨씬 부족하잖아요. 제가 시사 프로그램 해보지도 않았었고 만약에 저에게 다른 프로그램을 줬다. 제가 잘하는 거는 코미디고요. 코미디 이외에 또 다른 어떤 새로운 거를 주셨다 그러면 저는 그렇게 노력할 것 같아요.모든 분들이 저만이 아니고 근데 전 진짜 그때는 되게 열심히 노력했어요.
◇ 이성규 : 그러니까 그 시사프로 진행이 또 인생에 있어서 시민단체하고도 만나게 되고 녹색 연합이라든가 유니세프라든가 국가인권위원회 이런 쪽하고 인연이 맺어지게 된 계기도 됐나요?
◆ 김미화 : 아닙니다. 그분들하고는 제가 코미디언 시작하면서 유니세프의 홍보대사로 처음 일을 하게 됐고요. 저는 사회복지 쪽을 굉장히 하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어려운 분들이 있을 때 같이 웃고 울고 하는 거를 손 맞잡고 따뜻하게 한번 해보고 싶다 하는 생각을 옛날부터 굉장히 많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유명해지면 정말 이름을 얻게 되면 그런 분들하고 함께 하는 거 굉장히 내가 행복하겠다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 분들하고 쭉 이제 사회 활동하다가 그런 단체들에 제가 홍보대사를 굉장히 많이 하다가 시사 프로그램을 하게 됐고 시사 프로그램 하게 됐을 때는 제가 사회복지 공부를 늦게 시작을 해서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시작을 했습니다.
◇ 이성규 : YTN 라디오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방송인 김미화 씨 자리하고 계십니다. 김 선생님 우리 여기서 노래 하나 듣고 가거든요.
◆ 김미화 : 노래 들을까요?
◇ 이성규 : 어떤 노래 하나 소개하시겠어요?
◆ 김미화 : 예 그러지 않아도 제가 오기 전에 여기 PD님께서 노래 하나를 좀 골라오라고 하셔서 제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고 그리고 아침마다 저한테 피아노를 치면서 들려주는 노래예요. 제 남편은 제 2의 인생을 지금 학교를 은퇴하고 시작을 하고 있는데 학교 선생님이었었거든요. 그래서 시작을 하고 있는데 본인이 그 연주인으로 사는 게 뮤지션으로 사는 게 꿈이에요. 피아노맨이라는 노래 있거든요.
◇ 이성규 : 네
◆ 김미화 : 그 노래를 그 의미와 그다음에 부인 이럴 때 이 한번 상상을 해보시오.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뭐 이러면서 쫙 얘기를 하면서 피아노를 쳐줘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곡입니다.
◇ 이성규 : 김미화 씨가 소개하신 빌리조엘의 피아노맨 듣고 오겠습니다. 빌리조엘의 피아노맨 듣고 오셨는데요. 이성규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은 멈추지 않는 도전하는 삶에 대해 얘기 나눠보고 있습니다. 개그우먼 김미화 씨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그런데 또 얘기를 좀 이어가 보자고요. 뭔가 또 좀 어려움이 또 있었다고 그러더라고요. 블랙리스트로 알려져 있던가요? 우리한테 그 얘기 좀 해주시죠.
◆ 김미화 : 그 얘기는 뭐 하러 하세요? 자꾸 떠올리면 제가 진짜 블랙리스트 같잖아요. 아직까지도 그게 이제 지금 뭐 해결이 안 되고 있다. 저로서는 그 당시에 민간인 사찰을 당하셨던 분들이 있어요.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계시는데 그게 뭐 아직까지도 조금 힘들고 있는 분들 많으시죠? 인생에 있어서 뭐 재미있는 경험이 없다 생각하면 그걸로 뭐 되는 거죠. 뭐 말 못할 고통은 있었죠. 근데 방송으로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기가 좀 그런데요.
◇ 이성규 : 그러다가 또 2020년에는 문화재단 대표이사 취임을 하세요. 방송은 방송대로 어려움도 있고 또 원래 노력하는 분이니까 준비도 많이 하셨고 그렇지만 기관을 운영하는 CEO는 또 좀 다른 경험이거든요. 어떠셨어요?
◆ 김미화 : 글쎄요. 제가 농사를 짓고 이제 시골로 내려간 지 오래됐으니까요. 제가 가지고서 즐길 수 있는 어떤 놀이라고 할까요? 컴퓨터 뒤지고 컴퓨터로부터 지식도 얻고 글도 쓰고 뭐 이런 건데 그러다 보니까 저희 남편이 뭐를 하나 찾아가지고 부인 여기 그 안산이라는 데가 여기가 다문화 가족들도 굉장히 많으시고 그다음에 세월호 가족들도 계시고 뭐 그런지 특별한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이니 여기 보니까 문화재단에서 대표를 뽑네.부 인이 이런 거 한번 해보면 어떨까 왜냐하면 제 남편이 보기에 제가 뭐 여러 가지 고통으로 인해서 마치 그 시골에 유배돼 온 사람 같은 느낌. 그러니까 굉장히 활기차게 일을 해야 되는 시기인데 그냥 시골에 와서 이렇게 들판이나 바라보고 뭐 이렇게 물 흐르는 거 이렇게 보고 농사짓고 하루 종일 힘들고 뭐 이런 거가 좀 안쓰러웠던지 그런 이야기를 해서 의미 있겠다. 그래서 거기에 이제 용기를 내가지고 이력서를 냈는데 떨어지면 되게 또 뭐 말이라는 게 이렇게 또 발이 달린 것처럼 확 또 소문이 나잖아요. 그래서 굉장히 곤란할 것 같아서 용기 있게 넣긴 했습니다마는 떨어질까 봐 뒷문으로 살살 가가지고 이제 시험도 보고 그랬는데 다행히 거기 시장님께서 저를 좋아하셔가지고 뽑아주셨어요. 그래서 2년 동안 사실은 그 안산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어떤 따뜻한 문화 이런 것을 좀 같이 공유하고 뭔가 뜻을 좀 펼쳐보려고 했었는데 부족함이 많았죠.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내가 많은 도움을 못 드렸네라는 생각도 있습니다마는 직원들이 또 열심히 해 주셨고요. 저도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또 우리 코미디언 후배들도 오셔가지고 또 공연도 해주시고 그래서 제가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 이성규 : 그 안산이 뭐 다문화도 많고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 도시인데 여러 가지 일 펼치신 중에서 좀 기억나는 일 있으세요?
◆ 김미화 : 당시에는 코로나가 조금 좀 심해가지고 제가 하고 싶었던 그런 야외에서 하는 찾아가는 공연 같은 거를 활발하게 많이 못했었어요. 그런데 안산하면 거기에 거리극 축제라고 굉장히 크게 세계 각국에서 내려와서 공연도 함께 하고 그런 큰 축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제가 2년이니까 첫째 해는 못했고 둘째 해도 거의 많이 축소해가지고 거리에서 진행이 됐었고 그런데 그때 이제 반월공단이라든지 뭐 이런 다문화 가족 여러분들 또 안산에 있는 시민 여러분들 이런 분들이 전부 다 나오셔가지고 함께 어우러져서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공연을 좀 많이 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그 아쉬움을 가지고 마지막 해를 보냈습니다.
◇ 이성규 : 재혼하셔서 16년을 지내셨는데요. 지금도 애틋하신가요? 두 분이?
◆ 김미화 : 예 애틋하다기보다는 그냥 편안한 사이. 그냥 헌 신발 운동화 같은 그런 편안함이 있어요. 남편이나 저나 그리고 서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 서로 싫어할 행동 같은 거는 조심을 하는 것 같아요.실제로 매번 결혼 기념일마다 참 감사하다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너무 고맙다 서로 그렇게 인사를 하면서 손을 꼭 잡죠.
◇ 이성규 : 그런데 저희한테 알려져 있기는 사회복지 쪽에는 두 가지가 알려져 있어요. 하나는 김미화 씨가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또 하나는 장애인 부모다. 그렇게 됐는데 지금 자녀분이 많이 컸나요?
◆ 김미화 : 예. 저희 큰 아들이고요. 38살이에요. 발달장애가 있고 경계성 장애여서 본인이 장애가 있다라고 깊게 인지하지 못하는
◇ 이성규 : 등록은 안 했군요.
◆ 김미화 : 아니에요 아니에요. 등록 했어요. 장애가 좀 좀 깊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본인 스스로 본인 스스로 나는 장애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컴퓨터를 굉장히 잘하고요. 서번트 증후군처럼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서 드럼 악기 잘하고 그래서 드럼 전공을 했고요. 그리고 지금은 앙상블, 드림위즈 앙상블이라고 거기서 정직원으로 근무를 한 지 꽤 됐어요. 2년 3년 됐습니다. 그래서 드럼 굉장히 잘 하고 그다음에 우리가 엉덩이 질긴 사람 이야기하잖아요. 근데 그 드럼을 한 번 붙들면 하루 종일을 연습을 하거든요.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하는데 잘 못할 수가 없잖아요. 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랑스럽습니다.
◇ 이성규 : 사회적으로 좀 힘든 편견, 차별 이런 것도 좀 느끼셨나요?
◆ 김미화 : 분명히 있죠. 차별이라는 게 분명히 있죠. 그러나 이제 저희 부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자 우리가 행복하면 다 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 네 그런데 이제 두 분이 서로 말씀들을 하실 것 같아요. 혼자 놔두게 되면 어떡하나 그런 좀 먹먹한 마음.
◆ 김미화 : 장애 가족이 있는 분들은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아마 장애가 있는 사람보다 내가 삼일만 더 살아서 뒤처리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다 하실 거예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 바라보면서 안쓰럽죠. 이 문제는 장애 문제는 형제가 있다고 그래서 그 사람들도 다 자기 인생이 있는데 해결해 줄 것 이 아니고 뭐 그런 또 형편이 안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마음이야 왜 없겠습니까마는 주변 또 그렇고 그러니까 뭐 걱정이 많죠. 많습니다.
◇ 이성규 : 사회가 좀 다가가는 그 방향성이 빨리 나와야 되겠네요.
◆ 김미화 : 그럼요. 좋아지고 있잖아요. 교수님
◇ 이성규 : 용띠 해잖아요. 지금 용띠
◆ 김미화 : 청룡해죠. 올해가. 그래서 진짜 올해 여러분들 다 잘 되실 것 같아요. 청룡의 해가 또 특별한 해라고 하대요. 갑진연에 값진 일이 굉장히 많으실 것 같은. 어려울수록 힘을 많이 내시고 이게 있어요. 교수님도 아시겠지만 사랑의 열매에서 하는 온도계 있잖아요. 온도계 항상 광화문에 세워져 있죠. 네 근데 사랑의 온도계가 언제 많이 올라가는 줄 여러분 아마 모르실 거예요. 세상이 어려울수록 힘든 일이 많을수록 서로 마음과 마음을 보태고 종이 한 장도 같이 들자라는 생각으로 온도계를 자꾸 올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랑의 열매 여러분들이 깜짝깜짝 놀라고 저한테 얘기하시거든요. 여러분 지금 세상이 어렵더라도 이때 우리가 힘을 합치고 어려운 분들과 함께하고 우리 가족들과 함께하고 함께하는 마음이 있으면 충분히 거기에다가 또 청룡의 해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늘이 아마 좋은 기운을 주실 것 같아요. 여러분 힘내십시오. 파이팅 음메~ 기살어
◇ 이성규 : 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은 개그우먼 김미화 씨 모시고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김미화 : 감사합니다.
◇ 이성규 :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YTN 라디오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c) YTN radio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