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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전문

방송시간[일]^20:20-21:00
제작진PD : 박준범 / 작가 : 조경헌 / 진행 : 김영민 아나운서
[잠시만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방귀희 이사장, "비장애인들의 관심 필요해"
2025-09-04 04:38 작게 크게
[잠시만요] 

■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5년 8월 3일 (일요일)
■ 진행 : 김영민 아나운서
■ 대담 :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방귀희 이사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내용 인용 시 YTN라디오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김영민 아나운서(이하 김영민) : 최초라는 단어, 평범한 사람에겐 부담일 수 있죠. 그런데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길을 여는 용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은 최초의 기록을 여러 번 써내려오신 분 모셨습니다. 쉽지 않은데요. 최초가 여러 번이라고 하네요. 최초의 수석 졸업 장애인. 최초의 휠체어 방송인. 최초의 장애인 문학지 창간인. 그리고 국내 최초로 장애 예술인 지원법 제정에 앞장선 분이시기도 하죠. 지금은 현장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꾸준히 장애인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계시는데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방귀희 이사장님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방귀희 이사장(이하 방귀희) : 네. 안녕하세요.

◆ 김영민 : 웃음소리가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 방귀희 : 너무 칭찬부터 시작해서.. 제가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 김영민 : 너무 훈훈하게 또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장님. 청취자 여러분께서 듣고 계실 텐데요. 간단한 인사와 자기소개를 좀 부탁드릴게요.

◇ 방귀희 : 네. 제 이름은 방귀희이고요.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은 재단법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입니다. 저는 그 돌잔치를 앞두고 소아마비 바이러스 감염으로 아주 중증의 지체 장애인이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들어올 때도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기 때문에 의자를 치워야 하는데, 대개들 보면 의자가 다 세팅돼 있는 상황이어서 의자 치우기에 바쁩니다. 어디를 가든지 간에.

◆ 김영민 : 그리셨군요. 

◇ 방귀희 : 그리고 장애인 예술 전문가 이렇게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제 자신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영민 : 장애인 예술의 전문가로 인식되기를 바라시는 방귀희 이사장 모셨습니다. 지금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이사장으로 계시잖아요? 이 기관이 친숙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좀 낯설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 방귀희 : 그럼요.

◆ 김영민 : 간단하게 소개를 좀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방귀희 : 지금 현재 대학로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2015년에 설립이 됐어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은 근데 건물 명칭은 이음 센터예요. 그런데 여의도에 이룸 센터가 있어요.

◆ 김영민 : 그렇군요.

◇ 방귀희 : 그래서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앞에. '대학로'라는 말을 반드시 붙여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원에서는 충정로에 모두 예술 극장을 운영하고 있고요. 또 서울 스퀘어 별관에 모두 미술 공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극장과 전시관이 있어서 복합 문화 공간을 다 갖춘 그런 시설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 김영민 : 네, 굉장히 딱 들었을 때 규모가 굉장히 커보입니다. 이 문화예술원. 장애인문화예술원의 이사장으로 있는다는 것이 부담이 좀 있으실 것 같기도 한데요. 어떠세요?

◇ 방귀희 : 그렇습니다. 저는 올해 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저한테 이런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었는데. 저한테 이제 마지막 과제로 이렇게 큰 자리를 주셔서, 정말 최선을 다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규모가 크다기보다는 우리가 유일한 단체입니다. 장애인 문화·예술을 하기에는. 그렇기 때문에 저로서는 여기서 잘해야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장애인 문화·예술이 활성화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런 좀 책임감을 갖고 있습니다.

◆ 김영민 : 네. 지금 책임감 포부가 상당하신 것 같은데. 듣기로는 이제 부임하신 지가 얼마 안 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 방귀희 : 얼마 안 됐어요.

◆ 김영민 : 그전에는 좀 오랫동안 어떤 일을 해오셨는지 얘기를 들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방귀희 : 네. 제가 1981년에 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래서 그때 제가 대학을 수석 졸업을 했거든요? 그래서 KBS에 이제 출연하러 갔다가.. 방송 작가가 됐습니다.

◆ 김영민 : 작가로 계셨군요.

◇ 방귀희 : 네. 그래서 31년 동안 방송 작가로 일을 했어요.

◆ 김영민 : 선배님! 31년의 경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경력이 아니거든요.

◇ 방귀희 : 저는 뭐든지 하면 꾸준히 하는 좀 습관이 있어서. 그래서 2012년에 잠깐 공직 생활을 하게 됐었고요. 그래서 그거가 끝나고 나서는 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제가 이제 2013년도에 우리나라 최초로 장애인 예술로 박사 학위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이제 대학 강의를 했고. 그 전에 이제 방송 작가 일을 하면서 수입이 좀 생기니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1991년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문학집 '솟대문학'을 발간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제 2013년도에는 한국장애인예술협회를 만들어서 우리나라에 있는 장애인 예술인들의 권리 보장. 이런 기치 아래 전국에 있는 장애인 예술인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하다가 이제 2015년도에 장문원 만드는 일에. 우리는 이제 우리 제가 있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을 줄여서 '장문원'이라고 하는데. 장문원 만드는 예산 작업을 또 제가 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 방귀희 :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법 만드는 일도 제가 했죠.

◆ 김영민 :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일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하고. 또 감명 깊었던 게요. 저는 이제 돈이 생기면 뭘 사 먹지? 이런 생각하고. 무슨 옷 사지? 이런 생각을 할텐데. 장애인 문학지를 창간하셨다는 점도 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이 모든 삶의 자체 자취들이 장애인 문화예술원의 이사장으로 일하는 데 다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방귀희 : 그렇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들을 안 했으면, 이사장 자리가 제안이 왔다 해도,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면서 좀 걱정했을텐데. 지금은 오히려 그런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시작할 수가 있었죠.

◆ 김영민 : 맞습니다. 장애 예술인을 위해서 온 삶을 다 바치셨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은데요. 사실 장애 예술인이라는 단어가 지금의 제게는 좀 익숙하게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처음 이 용어가 없었던 용어인데, 이사장님께서 만드신 거라면서요?

◇ 방귀희 : 그래서 제가 이제 다니면서 우리 장애인들도 체육도 하고, 사업도 하고, 교수도 되고. 각각의 영역에서 일할 수 있는데. 우리는 예술 활동을 하고 싶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너는 무슨 배부른 소리를 하니? 예술은 안 해도 된다. 이런 식이었죠. 장애인 복지계에서도.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것이 그냥 나의 주장이 되기 때문에 2013년도에 이것을 이론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제 박사 논문을 썼었거든요. 거기에서 처음으로 장애 예술인이라는 단어를 정의를 내렸고. 장애 예술인들이 하는 활동을 장애인 예술이라고 그렇게 명명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야의, 학문의 기반이 되기 위해서는 단어의 정의가 가장 중요하거든요?

◆ 김영민 : 그러면 장애 예술인에 관련한 논문에는 이제 항상 방귀희 이사장님이 인용이 되겠네요?

◇ 방귀희 :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그 아까 전에 잠깐 법안에 대한 이야기해 주셨거든요. 장애 예술인 지원법 이게 이제 최근에 공포되고 시행이 된 것으로 제가 좀 봤는데. 이사장님께서 오랜 노력으로 만드셨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좀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있으세요?

◇ 방귀희 : 2012년도에 연구부터 시작했어요. 과연 장애 예술인들이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 생각해 봤더니, 우리나라에서는 법이 없으면 아무런 행정이 이루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전으로 올라가 보자면은 장애인은 굉장히 오랜 옛날부터 존재했지만, 장애인 복지법이 1981년 세계 장애인의 해를 기해서 만들어지면서 그때부터 장애인 복지라는 말이 생기기 시작했거든요.

◆ 김영민 : 역사가 생각보다 짧네요?

◇ 방귀희 : 네. 그래서 저는 장애 예술인들을 위해서는 장애 예술인 지원법이 있어야 되겠다. 그러니까 독립법으로 있어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이제 연구부터 시작을 했고요. 그래서 이거를 이제 국회의원들한테 찾아다니면서 이제 법안 발의를 해달라고 해도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그래서 2016년도에 나경원 의원이 발의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2019년도에는 김영주 의원이 발의를 해서, 이것이 통합이 되면서 드디어 2020년에 장애 예술인 지원법이라는 것이 제정이 됐는데. 장애 예술인 지원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최초입니다.

◆ 김영민 : 괜히 뿌듯해지고. 약간 그 한 거 없지만, 저도 괜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되네요.

◇ 방귀희 : 느끼게 되네요. 그래서 이제 카타케스 면제 김영주 의원이 발의한 것은 장애인이었어요. 주어가. 그래서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에 관한 법률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때 주장한 것은 뭐였냐면, 주어가 장애인이면 안 된다. 장애 예술인이어야 된다. 그래서 이제 장애 예술인 기금 부분이 빠지면서. 그게 있으면 기재부에서 통과를 안 시켜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금 부분을 빼고 주어만 장애 예술인으로 해가지고 이제 법안이 통과됐는데. 제가 그때는 국회 안에서 어떤 힘을 행사할 수 없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주어가 지금 뭐죠? 주어가 어떻게 돼서 통과되고 있죠? 막 계속 초조하게 그렇게 대놓고 물어봤던 기억이 납니다.

◇ 방귀희 : 그렇군요.

◆ 김영민 : 그랬더니, 그 사람들은 그게 왜 중요하냐는 거예요. 장애인이건, 장애 예술인이건 다 장애인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이렇게 물었던 건데. 저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막 강조를 했었죠.

◆ 김영민 : 맞습니다. 장애 예술인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그것이 법제화가 되니, 그들이 보호받을 수가 있고. 세상에 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수가 있었네요.

◇ 방귀희 : 그래서 이제는 법적 지위가 확보됐다. 이렇게 저는 주장하고 있는 것, 주장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 김영민 : 정말 큰 발자취를 남기셨다는 말씀을 좀 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장애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법안이 생겼다는 것은 이들이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이 가장 큰 애로사항인가요?

◇ 방귀희 : 지금으로써는 창작 지원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술 활동은 처음부터 자본이 좀 들어가요.

◆ 김영민 : 그렇죠.

◇ 방귀희 : 예를 들어서, 미술을 하려고 그래도. 캔버스도 사야 되고. 물감도 사야 되고.

◆ 김영민 : 이젤 사야 되고. 물감 비싸고.

◇ 방귀희 : 네. 그러니까 선순환이 필요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창작 지원금이 없어서 재능을 썩히고 있는 분들이 너무 많다는 거. 그다음에 이제 공연 같은 거를 하려고 봤을 때. 그 접근성 문제에 있어서 관객을 위한 접근성은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서 휠체어석도 마련되고 그랬는데. 무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접근성이 안 되는 거예요.

◆ 김영민 : 거기까지 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 방귀희 : 그랬죠. 그러다 보니까 무대 위에 한 번 올라가면 화장실을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이죠. 막 이렇게 들어올, 휠체어를 들어 올려서 무대에다 막 얹어 놓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는 공간의 접근성이 조금씩 확보되기 시작하는 거. 그래서 우리가 예술 극장과. 모두 예술 극장과 모두 미술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게 바로 이런 논리였어요. 우리는 접근성이 떨어져서 도저히 일반 시설을 이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만의 공간을 주장하게 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서러웠던 것은, 예술로 인정을 안 해주는 거예요. 제가 왜 장애 예술인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대개 보면, 예술을 한다고 그러면. 아, 취미 생활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그리고 그게 치료가 되지요? 막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우리는 창작을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 김영민 : 그렇죠.

◇ 방귀희 : 그래서 전문 예술인으로 봐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그런지 관객들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공연 내용은 너무 좋은데 텅 빈 객석을 보면서 정말 너무 슬퍼질 때가 많아요.

◆ 김영민 : 그러셨군요. 아직도.

◇ 방귀희 : 아직도 그렇습니다.

◆ 김영민 : 한국 장애인 문화예술원에서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하시는지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 방귀희 : 저희 장문원에서 하고 있는 일은. 그러니까 창작 지원금을 공모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제 공모 사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이러이러한 사업을 하겠다 하고, 페이퍼를 이제. 그 사업 계획서를 내면. 그것을 심사를 거쳐서 하는데요. 처음에는 규모가 아주 작았습니다. 2019년도부터 이미 시작했던 사업이었는데. 그때는 전체 예산이 42억 정도 밖에 안 됐어요. 우리 장애인 문화예술 전체 예산이. 그랬었는데, 지금은 공모 사업으로만 나가는 예산이 76억 정도가 됩니다.

◆ 김영민 : 굉장히 많이 커졌네요?

◇ 방귀희 : 굉장히 많이 커졌죠. 그래서 이제 그 지원 사업에 대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 지원율이 너무 높아지다 보니까 선정률이 낮아지는 거예요.

◆ 김영민 : 그렇군요.

◇ 방귀희 : 규모는 그 액수는 커졌는데.

◆ 김영민 : 그만큼 인기도 많아졌네요.

◇ 방귀희 : 그러다 보니까 지금도 저기 제가 이사장 되고 와서. 이사장님, 저 떨어졌어요. 난 이사장님 되고 나서 너무 좋아했는데. 막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 설명해 주느라고, 나는 심사에는 전혀 관여를 못한다. 이러면서 얘기를 해 주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가 지원 사업으로 열심히 하고 있고요. 그다음에 아카데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육 사업이죠.그러니까 창작·제작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아카데미. 그다음에 매개자 사업. 매개자 사업이라고 하는 것은 요즘 접근성 매니저가 굉장히 인기가 있어요. 이제 우리 장애인 예술인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이들한테 필요한 접근성을 좀 해줘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자면. 청각장애인한테는 저기 수화 통역을 해준다거나, 한글 자막을 넣어준다거나, 또 시각장애인한테는 음성 해설 서비스를 해준다거나. 이런 것들이 전부 우리가 접근성 매니저들이 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매니저들의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교육 사업 외에도 일자리 사업도 하고 있어요. 장애 예술인들이 일자리가 될 수 있는 예술단을 창단하도록 지원해 주는 그런 사업입니다. 사업의 종류는 뭐 한 100가지가 넘습니다.

◆ 김영민 : 사업의 종류 100가지 넘어서. 이 방송에서 다 얘기할 수가 없겠네요.

◇ 방귀희 : 자잘한 사업이 그렇습니다.

◆ 김영민 : 나중에 한 10부작으로 저희가 한번 구성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대학로 이음센터라는 건물이라고, 저희에게 아까 소개를 해 주셨잖아요? 그 건물에 대한 소개도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 방귀희 : 그럼요. 제가 이제 처음에 이 작업을 이제 할 때. 저희가 이제 여의도에 있는 이룸 센터는 보건복지부 산하 단체들이 1순위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2순위, 3순위이기 때문에. 들어가서 우리 회의조차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얘기들을 이제 막 하다가 우리가 이제 장애인 문화예술 센터가 필요하다 공간이 필요하다 했는데. 그때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당신들이 원하는 곳은 어디요? 이렇게 얘기를 하길래, 저희는 대학로로 가고 싶습니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깜짝 놀라시는 겁니다. 넓은 공간 마련해서 거기다 짓는 게 어떠냐고 그러길래. 아니다. 우리는 있는 공간에 들어가서, 리모델링해서 들어가겠다고 굉장히 구체적으로 제가 말씀을 드렸었거든요. 그래서 이음 센터가 대학로에 이제 만들어지게 됐어요. 근데 이제 놀라워하는 것은 뭐냐면, 이제 특히 일본 사람들이 와서 놀라는데. 어떻게 이렇게 문화의 중심지에 장애인 예술 센터가 있냐는 거예요. 일본에는 '하나 센터'라는 것이 있는데, 아주 시골 구석에 있습니다. 굉장히 넓고 좋죠. 하지만 사람들이 잘 발걸음을 해주지 않는 곳이에요. 그래서

◆ 김영민 : 약간 음지의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 방귀희 : 네. 그러니까 복지 센터 같은 분위기인데. 우리는 완전히 여기는 이제 굉장히 좋은 환경에서.

◆ 김영민 : 젊음이 넘쳐 흐르는 곳이잖아요? 예술과 문화와 젊음이.

◇ 방귀희 : 그렇죠. 그래서 처음에는 이제 이제 2015년도에는 우리가 들어가긴 했는데, 완전히 섬이었어요. 우리한테 와주지도 않고. 우리를 부르지도 않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이사장으로 오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게. 이제 우리가 섬 생활은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가 그 주변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참여하겠다. 그래서 일반 예술이라든지 이런 데서 하는 행사에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우리가 여기에 입주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 김영민 : 한 가지 궁금한 게요. 장애 예술인이라는 개념이 정립이 됐다면, 그럼 장애 예술인으로 인정받는 기준도 있을 것 같거든요?

◇ 방귀희 :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술인이라고 했을 때. 예술인의 자격이 뭐냐? 이렇게 사람들이 묻으면, 대개 데뷔를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문학 같은 경우는 무슨 이제 등단을 해야 되고. 그다음에 이제 음악 같은 경우도 어디에선가 수상을 해 갖고 등단을 하고, 그렇게 하게 되는데. 근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거든요.

◆ 김영민 : 그렇죠.

◇ 방귀희 : 그러다 보니까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만들어졌어요. 그것이 이제 2012년도에 만들어졌는데 그래서 여기서 그때 실시한 게 뭐였냐면은 예술인 증명 제도예요.이 사람이 예술인이라는 걸 증명해 주는 거예요. 네 근데 거기에는 그 조건이 예술 활동을 5년 동안에 다섯 회를 해야 돼요.근데 5년 동안 5회 하는 게 아예 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불러주지 않으면 못하는 경우들도 많잖아요? 그랬는데. 이제 우리가 여기에 이제 등록을 해야 되는데. 장애 예술인들이. 우리는 5년 동안에 다섯 번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우리야말로 원고 청탁이 온다거나, 전시회 불러준다거나, 같이 하자고 한다거나 그런 게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여기 장문원에 오기 전에 맡았던 단체가 한국장애예술인협회잖아요? 거기에서 연구를 하면서, 장애 예술인 증명제도가 별도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래서 이것도 3년에 3회.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 예술인에 포함되도록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그리고 제가 그 협회에 있으면서 장애인 수첩도 만들고 그랬거든요.

◆ 김영민 : 그렇군요. 

◇ 방귀희 : 그래서. 근데 아직 정부 측에서는, 또다시 예술인 증명을 장애인 것으로 별도로 만들 수는 좀 없다. 이런 입장이셔서 지금 굉장히 어려움 속에 있지만. 이것도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김영민 : 모두가 장애 예술인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인정받기를 바라는 그 마음으로 이 부분도 개선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YTN 라디오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방귀희 이사장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가 딱 이 순간에 추천곡을 들으면서, 이분의 음악 취향은 어떤 것일까 얘기를 좀 나눠보거든요. 혹시 추천곡 있으실까요?

◇ 방귀희 : 저는 이 프로그램의 타이틀을 보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하고 똑같네 라고. 아, 너무 반가웠어요.이승철의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이 노래는 제가 반복해서 듣는 애창곡입니다.

◆ 김영민 : 네.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저희 방귀희 이사장님의 신청곡입니다. 추천곡 중간으로 듣고 오겠습니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시간에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를 추천곡으로 듣고 왔습니다. 저희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방귀희 이사장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있었는데요. 앞서서는 이제 장애인문화예술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눠봤다면. 이사장님에 대한 얘기도 조금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개인적으로 가장 큰 관심사 있으세요?

◇ 방귀희 : 근데 제 개인 관심사도 역시 또 장애인 예술이에요.

◆ 김영민 : 그렇군요. 삶이 곧 장애인 예술이신 이사장님.

◇ 방귀희 : 그래서 장애인 예술이 많이 발전을 했는데. 그 가운데 장애인 문학이 가장 열악합니다.

◆ 김영민 : 문학이요.

◇ 방귀희 : 사실은 문학이 먼저 시작을 했거든요. 1991년도에 솟대 문학이 만들어지면서 시작을 했어요. 그리고 또 이 솟대 문학이 너무나 인기가 좋아서, 스탠퍼드 대학에서 이 1권부터 100권까지를 사 갔어요. 연구하려고. 그래서 저로서는 너무 가치 있고.

◆ 김영민 : 심지어 창간하셨잖아요?

◇ 방귀희 : 창간해가지고 100호까지 했는데. 그래서 저는 너무 자랑스러운 일인데. 지금 문학이 너무 열악한 입장이어서, 취업도 안 되고 있고요. 그리고 장애 예술인 창작물 우선 구매 제도에서도 지금 배제된 상태거든요. 그래서 장애인 문학을 좀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그냥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

◆ 김영민 : 사실 끊임없이 생각하다보면, 아이디어가 하나 탁 떠오르는 경우가 있잖아요? 조만간에 이제 장애인 예술 중에 문학 분야가 또 꽃이 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좀 드는데.

◇ 방귀희 : 그래서 가장 최근에 한 일은 이제 논문을 하나 썼어요. <장애인문학 은유 속 장애 해석하기: 고인이 된 장애시인의 시를 중심으로>, 그러니까 그 문학 속에서 은유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그걸 장애 입장에서 해석했더니 아주 재미있는 논문이 됐습니다.

◆ 김영민 : 꼭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관련해서 이어지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 임기 중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내가 이 성과는 내고 가겠다는 분야도 있으세요?

◇ 방귀희 : 네. 있습니다. 장애예술인 지원법을 만들 때. 아까 기금 부분이 빠졌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기금 부분을 다시 넣을 수 있는 방법은 법을 개정하는 것인데. 개정해서 넣는다고 해도 또 정부 돈이 들거든요.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장애예술인지원기금을 모금 활동을 통해서 해봐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구성 선생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솟대문학상 기금으로 2억 원을 저한테 맡기시고 가셨거든요. 그리고 또 저도 지금 월급을 열심히 모으고 있습니다. 그 모은 돈으로 또 기초가 될 수 있도록 저도 기부를 하고. 그래서 한 5억 정도가 이제 마중물로 이제 만들어진다면. 그렇다면 좀 탄력을 받지 않을까 싶어서. 저는 마지막으로 이 장애 예술인 지원 기금을 만드는 것을 저의 마지막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영민 : 장애 예술인 분들이 든든하시겠어요.

◇ 방귀희 : 제가 책임을 져야죠. 만들었으니까.

◆ 김영민 : 정말 멋있습니다. 저희 방송이 벌써 막바지인데요. 마지막으로 청취자 여러분께 혹시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실까요?

◇ 방귀희 : 제가 여기 써 왔어요. 뭐라고 써왔냐면. 관객이 되어 주십시오. 이렇게 써 왔습니다. 아까 이제 제일 어려움 중에 텅 빈 객석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말 관객이 없습니다. 그리고 소비자도 없어요. 구매자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특별한 날, 장애인 문인이 쓴 책을 좀 이렇게 구매하셔서. 거기다가 좋은 문장을 이렇게 써서 선물을. 카드 대신 선물을 한다든지. 장애인 미술인들의 작품을 이제 아이들의 방에 걸어준다든지. 또 장애인 공연을 가족과 함께 간다든지. 이렇게 가족 단위로 장애인 예술에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작가가 주는 감동. 또 작가가 만든 작품이 주는 감동. 이렇게 2배의 감동을 받으실 수 있다는 말씀을 제가 마지막으로 꼭 남기고 싶습니다.

◆ 김영민 : 제가 곧 있으면 월급날이거든요. 열심히 장애 예술인 분들의 예술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되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방귀희 : 감사합니다.

◆ 김영민 : 네. 오늘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방귀희 이사장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 

◇ 방귀희 : 네. 감사합니다.

◆ 김영민 :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YTN 라디오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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