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음 프로젝트 이거야!원(ONE)]
■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09:20, 23:20)
■ 방송일 : 2023년 8월 5일 (토요일)
■ 진행 : 김우성 앵커
■ 대담 : 김재원 역사학자
[이거야!ONE] 남과 북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특별한 유연함!?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김우성 앵커(이하 김우성)> 여러분들 모두 기억하시는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라는 거 아실 것 같습니다. 113년입니다. 마지막 한글조차 잊고서 영어로 말한 손자의 말, 가슴 아프죠. 이렇게 분단된 대한민국일 줄 안중근 의사께서 아셨을까, 이런 의미였습니다. 113년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향해 쏜 6발의 총탄 그리고 일제의 부당한 재판과 투옥 그리고 순국한 뒤 흐른 시간입니다. 유해를 고국으로 옮겨달라던 그의 유언은 아직까지 지켜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입니다. 그래서 남과 북이 함께 기리는 민족의 영웅이고요. 평화의 상징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남북이 함께 사랑하고 지켜야 할 문화 키워드, 오늘 스토리의 주인공은 순국 113년이 지난 우리 모두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입니다. 이 시간을 함께해 주실 분입니다. 역사학자 김재원 선생님, 유명한 분이죠. 저희가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 김재원 역사학자(이하 김재원)> 네, 안녕하세요.
◇ 김우성> 많은 분들이 알고는 있지만 본인 소개 짧게 부탁드립니다.
◆ 김재원> 역사 공부하고 있고요. 여러 군데에서 역사 가르치고 있는 역사학자 김재원이라고 합니다.
◇ 김우성> 안중근 의사, 그러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 물론 이렇게들 많은 국민이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안중근 의사가 어떤 분이고 어떤 위치냐면, 이런 업적 좀 말씀해주셔야 될 것 같아요.
◆ 김재원> 일단 항일 의병장이시고요. 정치 사상가이시기도 합니다. 군인이자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이셨던 분이셨고, 1909년에 초대 총감이었던 이토 이로부미를 저격하고 얼마 안 있다가 사형을 선고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군인으로서 대우받기를 원하셨죠. 지금 어떻게 보면 안중근 의사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는 전쟁 중인 거예요. 전쟁 중이기 때문에 적군을 쏜 거니까 거기에 맞게끔 대우를 해달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 김우성> 위국헌신 군인본분, 이 말 기억하실 겁니다.
◆ 김재원> 그 이전부터 활동했었던 의병 활동이라고 하는, 여기서 말하는 독립이라고 하는 게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일제에 의한 독립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 김우성> 일제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 김재원> 이 시기에 ‘독립’이라는 단어 자체가 ‘홀로 선다’는 의미인 거잖아요.
◇ 김우성> 정말 현대 주권 국가로서 설 수 있는가.
◆ 김재원> 그렇죠. 그게 대한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염원했었던 것이기도 하고 대한제국의 국민들도 염원했었던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요.
◇ 김우성>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시는데 북한 지역에서 태어나셨어요.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이렇게 알려졌네요?
◆ 김재원> 네, 해주 분이시고요. 집안이 굉장히 부유한, 그 지역의 유지이셨던 거죠. 안중근 의사의 인생을 쭉 살펴보면요 조금 특이한 게 있습니다. 다른 독립운동가분들이랑은 다르게 유연하세요. 원래 그렇잖아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기 고집이 생기면 자기가 생각해 온 바를 쉽게 꺾지 않습니다.
◇ 김우성> 현대 은어로는 ‘꼰대’라고 하죠.
◆ 김재원> 그렇죠. 그런데 안중근 의사는 그러지 않았어요. 세상이 변해가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물론 당연히 그게 사적으로 변해가는 게 아니라 공적인 어떤 사상 속에서.
◇ 김우성> 시대의 흐름도 같이 타고 가는.
◆ 김재원> 그렇죠. 그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일단 기본적으로 지주이시고요. 그러셨기 때문에 나라를 걱정하는 게 남들보다 당연히 조금 더 앞서 있을 수 있었죠. 사회 경제적 조건상, 그 가운데서도 진짜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 그리고 대한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어떻게 하면 실제 독립을 할 수 있게. 여기서 말하는 독립 아까 말하는 것처럼 홀로 설 수 있는가에 있어서 모습을 바꾸십니다. 세상이 변해감에 따라서. 지금 일본이 얘기하는 동양 평화라고 하는 건 잘못된 거다. 그래서 조선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동양 평화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제 본인 스스로 공부하고 본인 스스로 만들어낸 사상에서 동양 평화론을 다시 재해석을 하시는 거죠.
◇ 김우성> 지금 말씀하시는 부분까지만 들어봐도 기존의 질서에 굉장히 가까운,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쪽에 가까운 배경과 성장 환경에서 자라나셨는데 그리고 또 그 당시 그런 역사적 사건들이 많았는데 제가 감히 상상을 해보면 끊임없이 ‘이게 맞을까?’라고 되물으면서 유연하게 방향을 수정해 왔다. 그래서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당시에 여러 군데에서 주장하던 동양 평화론과 다르게 일종의 확립이 됐다. 이렇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 김재원> 굉장히 근데 그건 하기 힘든 일이에요.
◇ 김우성> 그렇죠.
◆ 김재원>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고집을 꺾으면서 지금까지 자기가 믿어왔었던 사상을 버리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나간다는 건 오히려 그것만큼 자기 철학이 뚜렷한 게 없는 거예요.
◇ 김우성> 400년 가까이 성리학, 유교의 철학 이념으로 통치되던 조선 시대 후기였는데 갑자기 그걸 모든 걸 바꾸고 변화, 그리고 나중에 카톨릭 세례를 또 받으시잖아요.
◆ 김재원> 네, 맞습니다.
◇ 김우성> 남과 북이 사실은 이념으로 갈라서면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 평가 역시도 조금 갈라졌습니다. 그것까지 분단되는 슬픈 상황이었는데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남과 북 공이 우리 민족의 영웅이라고 칭송을 합니다. 북한에서도 굉장히 존중받는. 독립 열사, 투사 이렇게 칭송받고 있는 거죠?
◆ 김재원> 그렇죠. 왜냐하면 1909년에 돌아가셨으니까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독립운동가분들 중에 또 사상적으로 경도되어 계신다거나 이념적으로 나뉜다거나, 이러기 전이었기 때문에.
◇ 김우성> 태동기였습니다.
◆ 김재원>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에서 좀 자유로우신 거죠. 그런 평가에서 되게 자유로우신 분이라 북한에서도 지금 많은 추승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표도 만든다고 하고요. 그다음에 하얼빈 의거 111주년 기념일을 맞아서 특히 좀 북한에서 굉장히 주목을 많이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에도 대외 선전 매체들이 있잖아요. 거기서 굉장히 특이하게도 ‘침략 원흉을 처단한 안중근’이라고 하는 특별 기사를 쓰면서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독립운동가의 하나로 북한에서도 계속적으로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죠.
◇ 김우성> 이게 좀 많은 국민들이 관심 있어 하는 부분입니다. 최근에도 저희가 독립운동가분들을 많이 국내로 대한민국 공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모셔 왔잖아요. ‘안중근 의사는 언제 모셔오나’ 이런 분들 많으시거든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죠?
◆ 김재원> 아직은 뭔가 뚜렷한 성과가 나왔다고 하기는 조금 힘든데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일단 북한에서는 1970년대부터, 그래서 1980년대에는 뤼순에 직접 유해발굴단을 보내기도 했었고. 중국이랑 접해 있기도 했으니까, 1980~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실 한국보다는 북한에서 유해 발굴을 하는 게 더 편했을 거예요. 중국에서 아무래도 좀 가까이 있었던 나라다 보니까. 그러다가 2008년이 되면 남북이 같이 합동으로 해서 유해 발굴을 진행을 했는데 사실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 김우성> 남과 북이 힘을 모으면 뭔가 될 것 같은데, 지금 남과 북이 공이 독립운동가로서 추앙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십니까? 유해 발굴이든 혹은 남과 북이 역사적인 측면에서 안중근 의사를 두고서 얘기를 하면 마치 대화의 물꼬도 될 것 같고요. 중요한 모멘텀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김재원> 중요한 분이죠. 특히나 아까 말씀드렸었던 것처럼 각자 남과 북이 각자 독립운동가들을 평가할 때 가장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건 그 독립운동가들의 이념과 사상이기 때문에 쉽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그 독립운동가들이 가졌었던 이념적 배경들 때문에. 그런 거에서 자유로운 분이시거든요. 그리고 식민지가 본격화되기 직전에 돌아가시기도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같이 기억하고 추모하고 같이 역사적인 무엇인가를 기념하기 굉장히 좋은 선례를 남기실 수 있는 분이셔서.
◇ 김우성> 독립의 공통분모가 될 수 있는 분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네요. 지금 사실 김재원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시는데요. 그 시기 1900년대 초 자체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다양한 방법들이 도입이 됐습니다.
◆ 김재원> 맞습니다.
◇ 김우성> 거기는 사회주의적 방법도 있고요. 또 자유민주주의 방법도 있고, 여러 방법들이 있다 보니까 사후에는 이게 약간 이데올로기적인 평가에서도 민감한 부분이 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고요. 독립에 투신하셨던 모든 독립운동가는 다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이죠. 이렇게 지금 좀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부분들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얘기, 안중근 의사에 대한 얘기를 많이 상세하게 하기보다는 어떤 가치가 있을지. 남과 북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점, 연결되어 있었던 부분은 어디일까라고 생각했을 때 안중근일 수 있다.
◆ 김재원> 안중근 의사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그 이후에 독립운동을 했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에 대한 이야기도 이제는 함께 할 수 있는 시작점으로서 안중근 의사가 필요하지 않나.
◇ 김우성> 저희가 앞서 이 ‘연리지’를 시작하기 전에 미국에 계신 안중근 의사의 손자 분께서 울면서 영어로 더듬더듬 말합니다. 이렇게 분단돼 있는, 그분은 “대한민국 만세”라고 하면서도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분단돼 있는 나라가 뭐냐. 이걸 보고 싶었겠냐라고 울먹이는 소리를 저희가 들려드렸잖아요. 역사학자로서 좀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인데요. 안중근 의사께서 만약 분단을 보셨다. 뭐라고 하셨을까요? 이건 좀 상상의 영역입니다.
◆ 김재원> 본인만이 강조하는 사상에 매몰된다거나 그렇다기보다는 좀 더 큰 그림 속에서 포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을까.
◇ 김우성> 소름이 돋았습니다. 상상의 영역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중근 의사께서 살아있었다면 이 분단을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남과 북이 함께 안중근 의사라는 공통분모에서 우리의 역사를 다시 돌아볼 수 있다는 얘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역사학자 김재원 선생님과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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