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짜 : 2023년 6월 25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홍종원 의사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잠시만요] 찾아가는 의사 홍종원"75m 고공 농성 노동자 찾아가기도..."
◇ 이성규 교수(이하 이성규)> 나라를 지키는 방법은 정말 많습니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도움이 필요한 그 누군가의 눈과 귀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오늘 만나볼 분은 “처방전은 병원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진료가 필요한 곳이라면 이곳저곳을 가리지 않고 직접 찾아가는 분이죠. 찾아가는 의사 홍종원 씨와 함께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홍종원 의사(이하 홍종원)> 네, 안녕하세요.
◇ 이성규> 자기소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 홍종원> 귀한 곳에 불러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저는 방문의료 클리닉, 건강의 집 의원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 홍종원입니다.
◇ 이성규> 방문의료 클리닉, 건강의 집 의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름이 조금 낯설어요. 어떤 곳인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 홍종원> 우리가 아플 때 병원에 찾아가서 진료 받는 것을 일반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최근에 ‘고령화’라는 말도 이제 많이들 들리고 있고 실제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장애인분들도 모든 장애인이 그런 거는 아니지만 거동이 불편한 경우도 있고 언어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사실 병원에서 진료 받는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요. 그래서 사설 119를 불러서 잠깐의 진료를 위해 병원에 가시는 분도 많이 계셨습니다. 저희 같은 경우는 2019년부터 환자의 집에 찾아가서 방문진료를 중점으로 하는 작은 의원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내원하는 환자들은 별로 거의 없고 저희 의사, 간호사가 환자의 집에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 이성규> 참 경제적으로 넉넉지도 않은데 사설 119까지 부르고 왔다 갔다 하시려면 불편하고 경비 들고 그러겠네요?
◆ 홍종원> 사설 119도 비용도 참 만만치 않아서 병원 가시는 것이 난처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고요.
◇ 이성규> 기사를 봤더니 동네에서는 ‘닥터 홍’, 줄여서 또 ‘닥홍’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면서요?
◆ 홍종원> 제가 방문진료를 하기 전에 지역사회 활동을 한답시고 이제 서울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 만나고 또 청소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때 별명. 애칭처럼 닥터 홍, 그것도 기니까 줄여서 닥홍이라고도 불리고 그랬습니다. 지금은 제가 사실은 선생님, 원장님.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좀 많긴 한데요. 여전히 저를 닥홍이라고 불러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 이성규> 그렇게 보시던 분 중에 생각이 좀 나는 분이 또 계세요?
◆ 홍종원> 제가 엄청 많은 환자분을 만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모든 환자분들이 기억에 남는데, 홀로 아버님께서 40대가 된 뇌병변 장애인을 홀로 돌보고 계셨어요. 담담하게 “14년 전에 엄마는 죽었어요.”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어렸을 적에 뇌막염이 걸렸는데 치료는 하긴 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장애가 남아서 아버님께서 이제는 40대 중반일 때 장애 아들을 홀로 돌보고 계신데, 물론 활동 지원인이 옆에서 돕고 있고요. 그런데 어떤 문제가 있었냐면 낙상을 너무 자주 해서 상처가 많이 나고 그때그때 응급실을 가긴 가는데요. 그때마다 응급실을 갈 수가 없어서 작은 상처는 저희가 가서 처치해드리고 소독해드리고, 그렇게 좀 도움을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그런데 지금 말씀을 들어보니 보통 일이 아닌데 찾아가는 의사가 돼야 되겠다. 내가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 먹은 계기가 있었어요?
◆ 홍종원> 원래 제가 성격이 좀 모난 구석이 있어서 남들이 안 하는 거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게 남들이 안 하는 특이한 걸 해야겠다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인데 뭔가 좀 선뜻 하고 있지 않은 일이 있다면 그 일을 내가 해봐야겠다. 그런 것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학창 시절에 봉사도 하고 장애인 가정에 찾아가 보기도 하고 그런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어쩌면 누군가는 소외된 분들을 찾아가는 일을 할 의사도 필요하겠다. 이런 생각 끝에 다행히 그런 마음을 제가 담아두고 있다가 지금까지 이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고 지금껏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성규> 2019년부터 찾아가시기 시작하셨다고 그랬는데, 의사로서 환자분들을 대할 때 어떤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 홍종원> 환자분들한테 정말 일단 감사한 마음을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집을 열어주신 거잖아요. 사실은 집을 공개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아무리 제가 의사고 그분이 아픈 곳이 있더라도요. 그래서 그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집에 들어서는 저는 제가 그분에게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떤 일도 있었냐면 저와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시는 분도 많이 계시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어쩌면 이분이 생애 마지막으로 만나는 의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존중의 의미, 존경의 의미, 그분이 가진 삶의 의미를 최대한 제가 마음 담아 존경하려고 하고 또 존중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 이성규> 이게 단순한 방문진료가 아니고 찾아가는 의사 선생님은 여러 가지 마음을 준비도 하고 또 하나하나 느끼시고 그러시나 봐요?
◆ 홍종원> 그러게요. 저도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시작한 것 같은데 정말 이 일을 몇 년째 하다 보니까 홀로 눈물을 닦을 때도 있고 생사의 위급한 순간들을 함께 마주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고, 그래서 정말 삶의 깊은 곳을 보게 되고 저도 그 덕에 좀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이성규> 그리고 제가 어느 기록을 봤더니 고공 농성자를 위해서 75미터 굴뚝까지 올라가셨다고 그렇더라고요.
◆ 홍종원> 네, 사실 노동자들이 그런 고공 농성까지 하면서 투쟁을 이어나가는 현실이 참 슬픈 현실인데요. 얼마 전이죠. 2018년쯤이었는데요. 75m 굴뚝에서 농성하시는 분이 있어서 저는 이제 약간은 가벼운 마음, 그러니까 나는 건강하니까 몸에는 자신 있다. 내가 건강하다. 그래서 “제가 가보겠습니다” 했는데 가봤더니 이게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너무 높고요. 그래도 안전 장비를 좀 하고 제가 굴뚝을 직접 대신해 맨몸으로 오르게 됐는데 처음에는 조금 무섭기도 했는데 그런데 여러 번 올라가게 됐어요. 투쟁이 길어져서요. 나중에 한 다섯 번 올라가니까 좀 익숙해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노동자분들과 만나서 굴뚝 위에서 얘기도 많이 했던 것들이 좀 기억에 남고 다행히 그때는 잘 타결이 돼서 그 사태는 일단락이 되긴 되었습니다.
◇ 이성규> 또 강남역 사거리에 교통 CCTV 철탑, 여기까지 또 올라가셨어요?
◆ 홍종원> 그때도 철탑에서 투쟁하시는 해고 노동자분 계셔서 한번 갔었는데 참 어떻게 여기 올라가셨을까 싶기도 하면서도 그 절박한 심정들을 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분도 어쨌든 다행히 잘 내려오시긴 했는데요. 제가 가서 대단한 진료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연대의 의미를 담아 의사로서 한번 건강 상태를 살핀다. 그 정도로 생각하고 좀 찾아뵀었습니다.
◇ 이성규> 그분들이 그때 거기서 단식을 하시지는 않았죠?
◆ 홍종원> 단식도 하셨고요. 제가 하는 역할이 뭐냐면 “안 됩니다. 단식까지 하시면 위험하십니다. 건강 생각하셔서 건강이 너무 상할 수 있으니 너무 위험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런 얘기를 제가 전달을 하곤 합니다.
◇ 이성규> 진료가 필요하면 그렇게 위험한 곳까지 찾아가시는데,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셨다는데 계속 그렇게 지속적으로 가시는 건 뭔가 원동력이 있을 것 같아요.
◆ 홍종원> 거창한 사명감은 아니에요. 저는 의사로서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요. 어떻게 들릴지 모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훌륭한 의사 선생님들은 병원에서 위중한 환자들을 수술하고 돌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저처럼 좀 실력은 부족하지만 환자를 아끼는 마음이 있는 의사가 있다면 누군가는 또 소외된 분들을 찾아가고,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찾아가고, 이런 역할도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지금은 참 기쁘고 감사하게 이 일을 하고 있고요. 약간의 사명감은 또 있다고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이성규> 도서벽지, 이런 쪽 아직 매우 심각한 지역들이 많지 않아요?
◆ 홍종원> 네, 사실은 우리나라가 의료 시스템이 참 좋긴 한데 분명히 소외된 분들이 있어서 방문진료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도 개선될 부분이 아직은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YTN 라디오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찾아가는 의사 홍종원 씨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쯤에서 노래 하나를 들어요. 우리 홍종원 선생님은 어떤 노래 하나 추천해 주시겠습니까?
◆ 홍종원> 장기하와 얼굴들의 ‘느리게 걷자’라는 노래를 추천해보겠습니다.
◇ 이성규> 철학이 있는 노래 같은데, 이 노래를 추천하시는 이유는요?
◆ 홍종원> 일단 노래가 재치 있고 참 좋은데요. 그 ‘느리게 걷자’라는 제목처럼 그 가사를 보면 우리가 너무 빠르게 살아가고 있는데 좀 느리게 걷고 좀 천천히 생각하면서 제가 하는 일처럼 아픈 분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 노래를 들으면서 하게 돼서요. 이 노래를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규> 찾아가는 의사 홍종원 씨가 추천하신 장기하와 얼굴들의 ‘느리게 걷자’ 듣고 오겠습니다.
♫ 장기하와 얼굴들 - 느리게 걷자
◇ 이성규> 닥터 홍 선생님이 어릴 때 꿈은 운동 선수였다고 그래요?
◆ 홍종원> 어렸을 때 꿈 중에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다. 그런 느낌으로 제가 운동을 그냥 좋아해서 ‘운동 선수가 되면 어떨까?’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사실은 그렇게 재능은 있는 편이 아니어서 운동 선수는 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좀 하고 있고요.
◇ 이성규> 특히 운동 중에 어떤 종목을 염두해 두셨었어요?
◆ 홍종원> 제가 좋아했던 운동은 구기 종목이어서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 이성규> 야구 선수 하셨으면 정확하게 치든지, 정확하게 꽂았을 것 같은데요. 수술하듯이요.
◆ 홍종원> 그랬으면 다른 의미로 제가 또 유명해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잘 모르겠습니다.
◇ 이성규> 그런데 운동선수 꿈이 있었는데 어쩌다가 의사가 되셨어요?
◆ 홍종원> 사실은 제가 의사라는 직업을 어렸을 적에 꿈꿔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어렸을 적에 좀 몸이 약해서 병원은 좀 자주 갔었던 기억이 있어서 병원이라는 곳이 익숙했던 적은 있었는데 제가 의사가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요. 우연한 ‘입시 방정식’ 끝에 의대에 입학을 하게 됐고 사실 의대에 입학하고 나서 그 당시에 재수는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의사가 되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보자고 좀 책도 보고 선배들 얘기도 듣고 해보면서 괜찮겠다. 아픈 사람을 만나고 보람이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돼서 지금껏 의대 입학 후에 의사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성규> 의대 입학 후 대학 생활이 좀 궁금해요.?
◆ 홍종원> 의대에 입학을 하면 의대생들이 한 번쯤 ‘의료 봉사 같은 거를 좀 해볼까?’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생각으로 마침 제가 강원도 강릉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선배들과 교수님이 홀로 계신 분들을 찾아가는 봉사활동을 하고 계셨어요. 저도 우연히 참여를 했는데 그때 만났던 분이 반신 마비가 된 장애인 분이 있었고 전신 마비가 된 중년이셨죠. 그런 분들의 집에 반 년 이상, 1년 이상 찾아가면서 그분들의 삶을 곁에서 좀 보게 됐죠. 그게 어쩌면, 저는 지금까지도 그때 봤던 그분들의 삶이 잊혀지지가 않고 그분들에게 건강이라는 게 어떤 의미일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되는데에 이어지게 된 배경이 된 것도 같아요.
◇ 이성규> 대학 생활 때 참여하셨던 것, 그러니까 젊고 한참 여러 가지 생각이 많고 활발할 때 그런 일들을 좀 많이 해야 될 것 같아요. 다른 영역에 있는 젊은이들도요.
◆ 홍종원> 세련되고 멋지고, 그런 것들에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요. 사실 그것도 이해가 되긴 하는데요. 청년들도 본인의 문제가 굉장히 힘듭니다. 하지만 또 아픈 이웃들의 문제도 돌아보고, 우리 사회에 소외된 분들, 불평등한 것들. 이런 것들을 본다면 삶이 또 다른 방향으로 좋아질 거라는 생각도 좀 하게 되거든요.
◇ 이성규> ‘누룽지’라는 동아리도 하셨던데, 이 ‘누룽지’가 뭔지 잘 모르겠고요. 여기서 또 멘토 같은 분을 만났다고 전해져요?
◆ 홍종원> 사실 저희 학교 다닐 때 왜 이름이 ‘누룽지’였는지는 저도 미스테리입니다. 봉사 동아리였거든요. ‘누룽지’라는 봉사 동아리에서 박웅석 교수님이라고 예방의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이셨는데, 예방의학교실이 복원 정책이라든가 지역사회의 건강 관리를 연구하고 이런 곳인데요. 교수님께서 학생들한테 맛있는 걸 사주시면서 봉사를 이끌어주셔서 정말 많이 배웠고, 그 덕에 어떻게 보면 고민의 지점이 협소해지지 않고 넓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 이성규> 지금 같이 활동하고 계신 김창호 원장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 홍종원> 사실은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방문진료를 하게 된 거는 김창호 원장님 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김창호 원장님께서 서울 강북 지역에서 독거노인들 방문진료 활동을 봉사로 그리고 또 보건소 소속으로 오랜 기간 동안 해오셨고 그것을 또 옆에서 제가 지켜보면서 저 선배랑 같이 저런 일을 배우고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건강의 집 의원을 김창호 선생님이랑 같이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건강의 집 의원, 이렇게 저렇게 봉사활동하시다가 졸업을 하셨어요. 졸업하시고 나서 지금까지의 활동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 홍종원> 제가 의대를 졸업하고 일단은 군 복무 때문에 공중보건의사를 하면서 인천의 백령도라는 섬에도 있었고, 남양주 지역에서 공중보건의사 생활을 했었는데. 그때도 시골에서 주민들을 만나는 경험도 했었고, 남양주 지역에 있으면서도 소외된 분들을 찾아가는 이동 진료 같은 것도 했었어요. 그런 일을 하다가 보통은 수련을 받고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에 들어가서 그런 일을 배우고 해야 되는데, 왠지 제가 그렇게 인생의 경로를 선택하면 제가 생각했던 소외된 분들 찾아가는 의사. 그런 꿈이 좀 흐릿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어요. 그래서 일단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 내가 즐거운 일을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해서 지역 사회에 집을 하나 얻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주민들과 축제도 하고 행사도 하고 소모임 같은 것들을 꾸리는 활동들을 했어요. 그런 활동들을 하면서 여러 지역 단체들도 찾아다니고 공부도 하고 사회 현장에도 찾아다니면서 그런 경험들이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습니다.
◇ 이성규> 지역 사회 안에 깊숙이 들어가셔서 나름대로 공동체 같은 느낌 속에서 같이 더불어서 사신 것 같아요. 제 느낌에는요. 그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나 지역, 이런 쪽에 의미가 남다른 게 있나요?
◆ 홍종원> 공동체, 일단은 지역 사회는 저는 쉽게 말하면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고 물론 젊은 사람들이나 이런 분들은 집은 자는 공간이고 직장과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최근에 코로나 같은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칩거하는 경험을 많이 했었을 것 같아 같아요. 그런 면에서 사실 지역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굉장히 중요하고 또 그곳에서는 분명히 이웃들이 있고 사실은 우리는 이웃들하고 친하진 않잖아요. 그게 아니라 내가 가는 슈퍼가 있을 수도 있고, 편의점이 있을 수 있고, 그렇게 이웃들과 우리는 만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이 지역 사회라는 공간이 우리 인생에 주는 의미가 굉장히 큰데, 그래서 그곳이 건강의 시작점이다. 이런 생각도 하곤 합니다.
◇ 이성규> 그런데 아까 공중보건의 때 이런저런 활동을 하신 것 같던데, 말씀드렸던 도서지역이나 어려운 의료 취약 지역에 공중보건의 분들을 대거 파견할 수 있는 여력은 되나요? 우리나라가요.
◆ 홍종원> 지금 공중보건의는 군복무 대체로 파견이 되고 있는데 여러 가지 여건상 공중보건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어서 그 덕에 지금 도서지역에 의료 취약 현상이 나타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시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데 이게 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도서벽지에 적은 어르신들을 돌보는 게요. 그런데 저는 그곳에 많지는 않더라도 의료인들이 어느 정도는 파견이 되고 혹은 방문할 수 있는 활동이 되어가지고 그런 취약지를 돌본다면 사실은 우리 사회가 건강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 이성규> 그런데 또 아쉽게도 요즘 의대 들어가는 학생들 중에 남자 수가 조금씩 줄고 있다면서요? 그래서 공보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말도 있어요. 맞아요?
◆ 홍종원> 네, 최근에는 여학생들이 또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의대 진학을 많이 하고, 그거는 또 한편으로는 되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군 대체복무로만 시골에 의사를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의료 인력들이 효율일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도서 벽지들을 돌볼 수 있는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 이성규> 건강의 집, 어떻게 보면 마을 사랑방 같은데. 강북구에 열게 된 동기는 어떻게 돼요?
◆ 홍종원> 아주 사실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김창호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강북구가 실제로 노인 인구 비율이 굉장히 높고 장애 취약 인구 비율이 굉장히 높은 지역입니다. 그래서 강북구라면 참 역설적이게도 내가 할 일이 있겠다. 이런 생각을 좀 하게 됐고, 그래서 저도 사실 강북구에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강북구에 찾아가고 또 주민들하고 친해지면서 이곳에서 지금까지 눌러앉아서 활동을 하고 있게 되었습니다.
◇ 이성규> 건강의 집 의원, 이 외에 터무니 있는 집이라는 게 있어요. 이게 뭐예요?
◆ 홍종원> 제가 지금의 방문진료 건강의 집 의원을 하기 전에 건강의 집이라는 마을 사랑방에 살면서 활동을 했었는데, 그때 몇몇 청년들이 저와 같이 지역 활동을 하면서 친해져서요. 그런데 집을 구하는 건 되게 어려운 일이어서 건강의 집이라는 상가 공간 안에 딸린 방에서 같이 몇 명이 살았어요. 우리가 같이 주말에는 축제도 하고 청소년들 교육도 하고 어르신들도 만나고 이런 활동을 하면서 또 같이 살고, 그렇게 몇 년 같이 살다 보니까 사람이 또 늘어나기도 하고 그래서 터무니 있는 집이라는 것은 선배 시민들이 출자를 해주셔서 전세보증금을 마련해 주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LH공사의 지원을 받아서 주택 한 채를 청년 주택으로 만들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렇게 청년들이 주거 환경을 만드는 일도 같이 했습니다.
◇ 이성규>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면, 어떤 것들을 채워가면서 10년 후 인간 홍종원의 모습은 어떨 것 같습니까?
◆ 홍종원> 정말 바람은 지금처럼 아픈 분들을 찾아갈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항상 저는 꿈이 없습니다. 저는 원하는 것도 없고 바라고 싶은 것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저에게 문을 열어주시는 환자분들이 있다면, 저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다면 찾아가고 싶고 물론 제도적으로 잘 완비가 돼서 그런 분들이 적어지는 것도 바람인데요. 그래서 저는 여전히 찾아갈 수 있는 의사, 찾아가기를 부탁을 할 수 있는, 연락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사실은 저는 가장 안타까울 때는 제 나름대로 찾아가서 진료도 하고 열심히 했지만 끝이 좋지 못하는 경우. 죽음이 꼭 나쁜 거는 아니지만 그럴 때 좀 안타깝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최선을 다하고 또 끝이 어떻더라도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좀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 이성규>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찾아가는 의사 홍종원 씨 모시고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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