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3년 6월 4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이주은 서울시 청년 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 실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잠시만요] 청년부상제대 군인 이주은"지뢰를 처음 밟았을 때 느낌은..."
◇ 이성규 교수(이하 이성규)> 돌아오는 화요일이죠. 6월 6일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한 날, 바로 ‘현충일’입니다. 우리나라엔 여전히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현충일을 맞이해 모셨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서울시 청년 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 이주은 실장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이주은(이하 이주은)> 네, 안녕하세요.
◇ 이성규> 청취자 여러분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이주은> 안녕하세요. 저는 해병대 예비역 대위로 전역을 하고 지금은 서울시 청년 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에서 운영 실장을 맡고 있는 이주은입니다.
◇ 이성규> 서울시 청년 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 이름도 되게 기네요.
◆ 이주은> 네, 맞습니다.
◇ 이성규> 이름으로는 대강 무슨 일을 하시는지 좀 유추는 가능한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 이주은> 저희는 군 복무 중에 다친 군인들 그리고 제대한 군인 분들 대상으로 해서 크게 세 가지 지원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법률 지원이고요. 두 번째는 심리 지원, 그리고 세 번째로는 취업 지원을 해서 법률 지원은 복무 중 다친 부상에 대한 보상을 받으실 수 있도록 돕고요. 심리 지원은 다친 트라우마에 대한 심리적 회복,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취업 지원을 통해서 사회로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주 업무로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법률 지원도 하고 그러려면 그 센터 안에 변호사도 있고 그렇겠네요?
◆ 이주은> 네, 저희가 지금 서울시복지재단에 사회복지공익법센터 소속으로 있기 때문에 공익법센터의 변호사님들이 지원해 주고 계십니다.
◇ 이성규> 그리고 취업하려면 또 장애인고용공단이라든가 이런 쪽하고도 관련이 있겠네요?
◆ 이주은> 네, 그쪽과도 연관되는 게 있고요. 그리고 또 서울시에 있는 기존의 여러 일자리 지원 정책으로 연계도 해드리고, 또 센터 자체적으로 취업 특강도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군 생활 중에 부상을 당한 분들인데, 앞에 ‘청년’이 들어갔단 말이에요. 청년 부상제대군인 센터인데, 청년 아니면 안 돼요? 만약에 45세가 넘은 분이 부상을 당했다. 그럼 어떻게 돼요?
◆ 이주은> 저희가 어쨌든 조례상으로도 청년 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이기 때문에 법적 청년이 만 39세를 넘어가면 예산 지원이 가능한 사업은 직접적인 지원을 못 드리지만, 기존의 법률 관련해서는 공익법센터로 연계해서 법률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를 드리고요. 그리고 서울시에서 꼭 청년 아니더라도 다른 지원 사업이 많기 때문에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사업 혹은 다른 정부 부서에서 지원하는 사업 쪽으로 안내도 해드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작년에 저희 센터를 신청하신 분은 할아버지셨는데 그 할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저희 공익법센터로 연계를 해서 지금 법률적 지원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 이성규> 어떤 계기로 이런 창구를 운영하게 됐는지 궁금하고요. 이런 계기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이지은 실장님의 군 생활부터 좀 알아봐야 되겠어요. ROTC 출신이고 해병대 전역했다고 아까 말씀하셨죠?
◆ 이주은> 네, 맞습니다. 저는 이제 ROTC 출신으로 해병대 소위로 2018년도에 임관을 했고요. 주 업무는 보병 소대장을 하다가 2019년도 5월부터 전방 경계작전 소초장 임무를 수행했어요. 육군으로 하면 GOP 개념인데요. 철책을 관리하고 저희가 근무하는 책임 구역으로 북한이 침투하거나 혹은 도발 상황에서 대처하는 임무를 맡는 소초장 임무를 수행했고, 제가 근무했던 곳은 한강 하구 김포 전방이었습니다.
◇ 이성규> 김포 전방, 군 생활은 주로 그런 쪽에서 하셨군요?
◆ 이주은> 소초장 임무 수행 전에는 소대장으로서 소대원들 교육 훈련하는 임무를 주로 수행했고요. 2019년 5월부터 소초장 임무를 수행했었습니다.
◇ 이성규> 그러다가 사고를 당하신 것 같은데, 김포 인근이었나요?
◆ 이주은> 한강 하구였고요. 김포 전방입니다. 위치로 보면 한강이 쭉쭉 흘러가서 김포를 지나 파주 사이로 흐르면서 북에서 흐르는 임진강과 만나고 그 임진강이 만나서 서해로 흐르게 되는데요. 저희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서해로 흐르는 쪽에 있었고 바로 북한에 있었습니다.
◇ 이성규> 그러다가 지뢰를 밟았다고 그러더라고요?
◆ 이주은> 네, 맞습니다. 제가 2019년 5월부터 소초장 임무를 수행을 했는데, 아무래도 경계 작전이라는 게 적이 침투해오는 거를 감시 장비로도 보고, 또 육안으로도 보고, 청음으로도 들어야 하는 상황인데 여름은 군대 갔다 오신 분들 알겠지만 정말 풀이 잘 자라요. 풀이 자라나는 속도가 눈으로 보일 정도로 자라는데, 한강 하구 쪽에는 갈대가 그렇게 잘 자랍니다. 갈대가 높은 건 한 3m까지 되거든요. 그래서 저희 대대 전반적으로 책임 구역 내에 있는 갈대를 제거했어야 했고, 하지만 또 해병대는 항상 인원이 많이 부족해요. 대원들도 계속 근무를 들어가고, 야간에 계속 근무를 들어가고, 또 취약 시기에는 초소 근무도 들어가야 되는데 할 작업은 있고 인력은 없다 보니까 제가 비번 시간에 나가서 새벽에 예초기를 돌리다가 저희 책임 구역이 한 100m 남았을 시점에 정말 마지막쯤에 지뢰를 밟았습니다.
◇ 이성규> 그때 기억을 소환하기도 싫으실지 모르겠는데 어떠셨어요?
◆ 이주은> 밟았을 때는 딱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날카로운 화약소리가 꽝 나면서 시야가 블랙아웃이 되고 그다음에 정신을 차려보니 귀에서 삐 하면서 이명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리고 처음에는 다친 왼발보다 오른발이 더 아팠어요. 그래서 오른발을 봤더니 오른발에는 까만 게 묻어있고 아마 화약이었을 거예요. 덜 아픈 왼발을 확인할 때 왼발 전단부가 날아가 있더라고요. 아예 폭발로 날아가 있었고 그때 들었던 감정은 ‘이제 내가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겠구나’라는 두려움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두려움, 공포가 가장 컸고 정말 파도라는 공포가 저를 덮치는 느낌이었습니다.
◇ 이성규> 치료가 끝나고 군에 다시 복귀를 하셨을 거 아니에요? 처우에 관련해서 다친 분들에 대해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궁금합니다.
◆ 이주은> 일단은 다치고 나서 보통 저처럼 장애를 얻을 정도로 다치면 의병 제대 등을 하시는데요. 제가 크면 크고 작으면 작은 사고지만 그때 제일 고마웠던 게 제 소초원들이었거든요. 제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저한테 편지를 써서 보내줬어요. 그러면서 전 소초장님이 잘 회복할 수 있는다고 믿는다. 소장님 그런 응원의 편지를 보면서 너무 제 소초원들한테 고마웠고 이 친구들한테 평생 은혜를 갚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 은혜를 갚는 길이 제가 다시 복귀해서 군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게 그 친구들한테 갚는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약 6개월의 재활 기간을 거쳐서 다시 복귀를 했고요. 복귀한 뒤에 저는 작전 쪽에서 일을 했었는데 참모로서 일을 하다 보니까 부상군인들에 대한 지원 제도, 규정이 남 일이 아니고 제 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더 찾아보게 됐고 너무나 아쉽지만 제가 보기에는 좀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군 생활을 계속한다면 이런 ,규정 제도를 바꾸기는 좀 힘들 것 같았고 오히려 전역을 해서 저처럼 다친 군인들을 돕는 게 더욱 가치 있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전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규> 그때 상태는 부상군인에 대한 사후 처리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신 것 같네요.
◆ 이주은> 네, 제가 다쳤을 때 물론 해병대 차원에서 정말 진심을 다해서 엄청나게 케어를 해주셨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군에서 복무 중에 다친 군인들을 위한 부서가 굉장히 적거든요. 매년 수천 명의 친구들이 복무 중에 다쳐서 전역을 하지만 그 친구들을 다 안내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인력이었고, 저도 그 과정에서 안내적인 부분에서 미흡함도 있었고요. 그래서 이전에 다쳤던 친구들한테 제가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그다음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를 물어보고 있더라고요. 그 친구가 2015년도에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양다리를 잃었던 하재완 예비역 중사였고, 그 친구를 통해서 많이 도움을 받았죠. 그리고 많은 위로를 받았죠.
◇ 이성규> 이 방송 첫 번째 출연자인 배우 이영애 씨가 그 당시에 목함지뢰 부상하신 두 분을 위해서 그때 기부금을 전달해 달라고 장애인 재단 측에 주셔서, 그걸 가지고 1사단을 방문해서 사단장님. 그때 하재헌 중사는 병원에 있을 때 저희가 전달을 하고 왔던 기억이 나는데, 우리가 좀 인연이 있네요.
◆ 이주은> 그러게 말입니다.
◇ 이성규> 그래서 하 중사를 만나서 어떤 얘기를 하셨어요?
◆ 이주은> 제가 다쳤던 글을 SNS에서 보고 재헌이가 본인이 면회를 가고 싶다고 댓글을 남겼었고요. 제 주변에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이 연락을 해서 재현이가 면회 오도록 마련해줬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제가 당시에 침대에 누워 있는데 재헌이가 갑자기 제 병실로 들어오더라고요. 제가 그때 느꼈던 감정은 ‘저 친구는 양쪽에 의족을 차고 저렇게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데 내가 여기 지금 누워 있어도 되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요. 그 친구가 저를 위로하러 와준 것 자체, 그 친구의 존재 자체가 저한테는 엄청난 위로였어요. 그래서 다쳤을 때는 ‘내가 장애인으로 어떻게 살아야지?’라는 걱정이 먼저였으면, 그 친구를 보면서 나는 저 친구에 비해 다친 것도 아닌데 저 친구는 어떻게 저렇게 웃고 있지? 그게 엄청 충격적이었어요. 그리고 저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얻었던 것 같아요.
◇ 이성규> 그래도 그 자신감과 함께 제대한 이후에 실질적으로 돕고 싶은 마음, 나중에 다친 후배들 돕고 싶은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요. 그때 하시면서 마음이 어땠습니까?
◆ 이주은> 막연하게 처음에 시작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전역하고 부상군인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을 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거든요. 구체적인 계획 없이 전역을 하겠다고 보고를 드렸고 그나마 제가 남은 군 생활을 어떻게 더욱 가치 있게 복무할 수 있을까 생각을 했을 때, 리더십 센터로 옮겨서 제가 다쳤던 경험 등을 좀 나누면 그나마 이 얘기를 듣는 해병대 장병들한테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리더십 센터로 옮겼고요. 그때 만났던 김인수 센터장님이 제가 부상군인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니까 굉장히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제가 좀 지칠 때는 불러서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많은 분들을 또 소개시켜주시셔서 전역 전에 있었던 부대에서 어떻게 보면 지금 사업을 잘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 이성규> 오세훈 서울시장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 이주은> 2021년도 6월 25일이에요. 그때 재헌이 소개로 제가 시장님 주관으로 하는 현충원 참배 행사에 참석을 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참배 행사가 주였기 때문에 제가 거기서 가서 무슨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전날에 저희 리더십 센터장님께서 가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꼭 말하고 지원 요청을 하라고 명령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참배 행사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시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고, 저희처럼 다친 군인들을 지원하는 센터가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시장님이 지시를 하셔서 그때부터 서울시와 같이 부상군인 지원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규> 국방부가 아니고 지자체를 두드리셨는지, 그게 좀 궁금하네요.
◆ 이주은> 일단은 그거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국방부에 두드리는 게 조금 조심스러웠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의 상급 부대니까 그랬던 것 같고요. 또 마침 오세훈 시장님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시장님께 먼저 말씀을 드리다 보니까 지금 이렇게 서울시와 같이 일하게 된 것 같습니다.
◇ 이성규> 부상제대군인이 몇 명이나 돼요?
◆ 이주은> 국방 통계 연보에 보시면요. 군인재해보상법의 장애보상금이라고 있습니다. 장애보상금 등급이 1급에서 4급까지 있고, 4급까지 되면 장애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데요. 장애보상금을 받는 분들이 최근 5년 평균 약 1천 명 정도 되고요. 저는 지뢰를 밟아서 좌측 족부 절반 정도가 절단이 됐는데 제 등급이 한 3급 정도예요.
◇ 이성규> 장애인복지법상의 등급하고는 다른 거죠?
◆ 이주은> 네, 그 등급이랑은 다르고 보상 등급이 또 별도로 있고요. 제가 1급에서 4급 중에 3급 정도고, 4급은 저보다 좀 덜 다치셨을 거고요. 1급, 2급은 정말 심하게 다치신 분들이고요. 그렇게 전역하시는 분들이 연 1천 명 정도 됩니다. 그 이외에 좀 더 경미한 부상까지 하면 최근 6년간 한 1만 명이 넘게 복무 중에 다치시고 전역을 하셨습니다.
◇ 이성규> 그럼 1천 명이 훨씬 넘네요?
◆ 이주은> 네, 맞습니다.
◇ 이성규> 6년간 1만 명 정도 넘어가면 참 이것도 상당한 문제네요. 이게 또 앞으로도 계속될 거 아니에요?
◆ 이주은> 어차피 군이라는 것의 목적은 국방을 위해서 살생이라는 수단을 저는 사용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적이 왔을 때 지켜내야 하니까요.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러면 안 되지만 장비의 결함이 있을 수도 있고 군 생활 중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인명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 같은 센터가 더욱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성규> 그 상담센터에 많이들 찾아오시나요? 어때요?
◆ 이주은> 저희가 작년 1년 운영을 하면서요. 작년 3월에 개소했고 12월까지 기준으로 120명이 신청을 하셨고요. 올해는 센터가 복지재단으로 운영이 되면서 더 홍보가 잘 돼서 시기적으로 봤을 때 작년보다 훨씬 많은 신청자들이 신청을 하고 계세요.
◇ 이성규> 군 내에 이런 거를 많이 홍보를 해놔야 될 것 같아요.
◆ 이주은> 군에도 홍보를 하고 이미 다쳐서 제대하면서 억울함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분들한테도 저희 센터가 홍보돼서요. 심적으로 아직 덜 풀리셨다면 심리 지원을 해드리고 싶고 정말 보상이 필요한데 이런 규정 절차를 몰라서 신청조차 못하신 분들한테는 저희가 법률 상담을 해드리고요. 그렇게 지원을 계속해야 될 것 같습니다.
◇ 이성규> 이주은 실장님 같이 만약에 육체적인 부상을 입으신 분만 이 상담센터를 찾아오라는 건 아니죠?
◆ 이주은> 네, 맞습니다. 저희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혹은 희귀 질환이 발병을 했든 군 복무 중에 다친 분들을 다 지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그런데 어디까지 지원해요? 아까 심리, 재활부터 시작해서 취업 얘기까지 나왔는데. 뿌듯하게 ‘이건 참 잘한 것 같다’라는 케이스가 있을 것 같은데요?
◆ 이주은> 보훈 심사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기간이 오래 걸리거든요. 그러니까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한 심사죠. 작년에 저희 센터를 통해서 신청하신 분들이 이제 하나 둘 심사 결과가 나오고 있어요. 그분들이 군 복무 중에 다쳤다는 걸 인정을 받아서 요건을 받는 결과가 이제 슬슬 나오고 있는 시점인데, 그분들이 요건 인정을 받으시고 고맙다고 말씀해 주실 때. 그때 굉장히 보람이 있고요. 그리고 저는 부상군인 당사자들도 지원이 필요하지만 더욱 지원이 필요한 게 가족들에 대한 지원이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지뢰를 밟았을 때 저는 그냥 발이 좀 다친 거지만 저희 어머님이 저는 더 다쳤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너무나 아쉽게도 아직 가족에 대한 지원 제도 자체가 없습니다. 그 어머님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볼 때 어머님들이 저를 만나서 얘기를 하시고 조금 표정이 밝아지신 걸 보면 그때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 이성규> 제도적으로 가족 지원 문제가 필요하고요. 그리고 보훈 결과가 나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좀 단축하면 안 될까요?
◆ 이주은> 단축도 지금 보훈처에서 이제 패스트트랙으로 해서 추진 중에 있고요. 확실히 옛날보다 심사 기간이 훨씬 빨라진 것 같아요.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 같은 센터가 왜 필요하냐면 군에서 복무 중에 다쳐서 전역을 하고 다친 분들이 국가보훈처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 보훈처의 등급 기준이 굉장히 높거든요. 예를 들어 아까 말씀드린 할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발가락 두 개가 절단됐는데 등급 외 판정을 받아서 국가유공자가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현재 법상으로는 발가락 3개 이상 절단이 돼야 최소 등급을 받기 때문에 지원을 못 받았고, 너무나 등급 기준이 높다 보니까 그 사각지대가 발생하고요. 그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은 저희가 지원을 하고 있고, 국방부와 보훈처가 같이 상의해서 좀 더 이 사각지대를 최대한 좁히고, 그 과정 중에 저희 지자체에서도 지원을 하고, 또 민간에서도 지원을 해서 그 사각지대를 최대한 없애는 게 맞지 않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이성규> 그렇군요. 최근에 윤석열 대통령 방미 때 함께 하셨더라고요.
◆ 이주은> 3박 5일 일정으로 워싱턴에 가서 대통령님 주관으로 한 오찬 행사에도 참석하고 한국전 기념공원에 가서 참배 행사도 참석을 했는데요. 일단은 워낙 짧은 시간 동안 갔다 오다 보니까 육체적으로는 굉장히 피곤했지만 정말 많이 배운 시간이었어요. 한 번은 저희가 만찬 행사를 하고 있는데 제가 다쳤던 얘기를 하니까 미국에 있는 모 컨설팅 업체 대표님이 제가 화장실을 갔다 올 때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나라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면서 한번 안아주고 싶다고 하시면서 저를 안아주셨는데요.
◇ 이성규> 한국 분이에요?
◆ 이주은> 한국 분이셨습니다. 제가 2019년도에 다치고 한국에서는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안타까운 동정, 연민의 눈빛이 컸거든요. 저도 아마 그렇게 다친 친구들을 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 미국 갔을 때 내가 다친 게 그냥 다친 게 아니라 나라를 지키다 다친 얼마나 순고한 희생이었는지를 다치고 4년 만에 미국이라는 먼 땅에 가서 느낀 거고, 우리나라도 군 복무하시는 분들 그리고 그중에 다친 분들이 좀 더 존경받고 “우리나라를 지켜줘서 고맙다”라는 얘기를 들을 사람들이구나를 이번에 미국에 가서 배우고 왔습니다.
◇ 이성규> 앞으로의 꿈이 궁금합니다. 지금 소통하고 계신 창구, 직업적인 꿈도 있을 거고요. 또 나아가서 여러 가지 개인 인생의 꿈도 있을 거고 목표도 있을 텐데, 끝으로 그런 말씀 한번 들어보죠.
◆ 이주은> 제가 다친 이후에 복무 중에 다치신 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거는 그분들에게 필요한 건 크게 두 가지였던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충분한 보상이고요. 두 번째는 그분들의 명예입니다. 보상이라는 거는 결국에 제도, 법이 바뀌어야 하는 거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좀 더 수월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이 들고요. 그분들의 명예를 위해서는 결국에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되는 것 같아요. 군복 입은 사람들 그 중에 다친 분들을 보면서 “나라를 지켜줘서 고맙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이 돼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더 노력할 거고요. 저희도 올해 센터의 중요한 사업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복무 중에 다친 분들을 기억할 수 있는 연극을 지금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평도 포격전 참전자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연극을 준비 중이고 6월 22일, 23일 서울시청 지하에 있는 바스락홀에서 공연 예정입니다. 제목이 ‘사운드’이고요. 3회 공연 예정입니다.
◇ 이성규> 서울시 청년 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의 이주은 실장 모시고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이 실장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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